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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선 수행법-생활선 이해(조사선)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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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2-03-13 03:11 조회1,17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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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선교육의 내용
 
(4) 생활선 이해(조사선) ②
 
15) 지극한 도(道)는 어렵지 않다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음이요(至道無難)
오직 간택함을 꺼릴 뿐이니(唯嫌揀擇)
미워하고 사랑하지만 않으면(但莫憎愛)
통연히 명백하니라.(洞然明白)
털끝만큼이라도 차이가 있으면(毫釐有差)
하늘과 땅 사이로 벌어지나니(天地懸隔)
도가 앞에 나타나길 바라거든(欲得現前)
따름과 거슬림을 두지 말라.(莫存順逆)
 
―《신심명(信心銘)》―
 
지극한 도는 결코 어렵지 않다고 한다. 그것은 고도의 학식이나 풍부한 경험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분간하고 선택하는 일만 그치면 된다는 것이다.
유행가 가사에도 있는 것처럼, 사랑도 미움도 없는 사람은 근심․걱정․괴로움이 없는 것입니다. 진리는 이처럼 단순한 곳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전히 애착하거나 증오하는 데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면, 결국 사랑과 미움은 한 뿌리임을 알 수가 있다. 궁극적으로 자신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지, 외부조건은 다만 보조요인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예컨대, 내가 어떤 사람을 지극히 사랑한다고 하자. 그때 그 상대방의 어떠 어떠한 매력에 이끌렸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마음 가운데 채워지지 않는 부분을 그 상대방을 통해서 채우고자 하는 것이 아닐까? 남이 나를 좋아하는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결국 내가 정말 잘 나고 매력이 있어서 좋아한다기보다는, 나를 좋아하는 이의 그 마음에 무언가 애착 같은 것이 근본요인이 되어 있다는 것이다. 내가 조금 남다른 면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의 보조요인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역경계(逆境界)가 닥쳐왔다고 해서 좌절할 것도 없으며, 순경계(順境界)가 왔다고 해서 들떠 좋아할 것도 없다. 행복의 결정적 요인은 결코 외부 조건이 아닌 내부 마음에 있음을 아는 이에게는, 역경계야말로 자신의 마음을 닦을 절호의 기회인 것이다. 순경계는 오히려 아상을 증장시킬 우려가 있으므로 한층 조심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수행하는 이는 역순경계를 모두 심상히 생각하고 다만 참 나를 깨치는 데 주력해야 할 것이다.
 
16) 불성은 항상 청정하다.
 
조사께서 주장자로 방아를 세 번 치고 가시거늘 내가 조사의 뜻을 알고, 삼경에 조사를 찾아가니 가사로서 문을 가리고 아무도 모르게 한 뒤, 금강경을 설해 주셨다.“응당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應無所住而生其心)”는 구절에 이르러 일체만법이 자성 속에 있음을 크게 깨닫고 조사께 말했다.
자성이 본래 청정함을 어찌 알았으리오.
자성이 본래 불생 불멸함을 어찌 알았으리오.
자성이 본래 구족함을 어찌 알았으리오.
자성이 본래 동요가 없음을 어찌 알았으리오.
자성이 모든 법을 창조함을 어찌 알았으리오.

―《육조단경 六祖壇經》―
 
자성의 발견과 그 대중화. 이것이야말로 육조 혜능(六祖 惠能)스님의 크나큰 업적이다. 육조스님의 일대기는 그야말로 한 편의 드라마와도 같다. 드라마에는 주인공이 있으며, 그 주인공을 보다 부각시키기 위한 상대역이 설정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상대역은 당연히 뛰어난 인물이며, 거의 최고인 듯 싶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주인공에게 최고의 자리를 내어줄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육조스님에게 있어서 그 상대역은 신수대사였다.
 
중국의 역사를 통틀어 전무후무한 여걸황제가 당나라의 측천무후이다. 이 여황제는 두뇌가 비상하고 성격도 과감했다고 한다. 한편 불교에 관해서도 관심과 조예가 깊어 화엄경론을 발간하면서 머리글을 붙일 정도였던 것이다.
이러한 여걸황제이니 만큼, 자신에게 불법을 가르칠 스님을 선정하는 것도 매우 까다로웠음이 당연하다. 당시의 가장 뛰어나다고 하는 고승들 가운데서 두 명이 뽑혔고, 그 둘 가운데 한 명을 택하는 방법으로 두 스님을 맨 몸으로 목욕탕에 들어가게 하고, 아름다운 궁녀들로 하여금 옷을 벗고서 시봉을 하게끔 했다. 스님들의 수행정도를 확실히 가늠해 보고자 했던 것이다.
 
이토록 험난한 시험을 거쳐서 마지막으로 선정된 고승이 대통신수(大通神秀, 607~706) 스님입니다. 신수스님은 측천무후는 물론 중종과 예종에게도 극진한 예우를 받아, 세 황제의 국사(國師)이며 장안과 낙양의 법주(法主)라고 일컬어질 정도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유학을 배웠으며, 박학다식하여 경. 율. 론은 물론이고 노장이나 훈고학, 음운 등에도 통달하였다고 한다. 또한 오조(五祖)인 홍인스님 회상에서도 상수제자로서 인정받았던 터였다. 그렇지만 이처럼 각 방면으로 탁월했던 신수스님으로서도 한 발짝 물러나 그 기량을 양보하고 감히 도력을 짐작하기 어려웠던 분이 바로 육조혜능(六祖惠能, 638-713) 스님이시다.
 
육조라는 말은 여섯 번째 조사(祖師)라는 뜻이다. 경론 연구와 강연 등에 전념하던 당시 중국불교의 이론적 경향에 대해서, 오직 마음법을 중시하는 실천적인 선(禪)을 고취함으로써 중국 선종의 초조(初祖)가 된 이가 보리달마(菩提達磨)이다. 보리달마는 이조(二祖) 혜가에게 법을 전하고, 혜가는 삼조(三祖) 승찬에게, 승찬은 사조(四祖) 도신에게, 그리고 도신은 오조(五祖) 홍인에게 법을 전하였으며, 홍인에게서 마음법을 전수받아 육조(六祖)가 된 이가 바로 혜능스님인 것이다.
 
혜능스님이 앞서 언급한 신수대사를 제치고, 육조로 인가 받아 의발을 전수 받은 것은 다름 아닌 행자(行者) 때였다. 가히 획기적인 사실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제 갓 입산해서 겨우 팔 개월 동안 방앗간에서 일만 하고 있던 행자 신분의 몸으로서 인가의 표상인 가사와 발우를 오조 홍인스님에게서 전수 받았다고 하는 것은, 누구든지 단박에 스스로의 자성을 보기만 하면 깨칠 수 있다고 하는 돈오(頓悟)의 예를 몸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혜능스님은 출가 이전에도 다만 어려운 환경에서 자라나 나무를 해서 어머니를 봉양하던 평범한 나뭇꾼에 불과했다. 다만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었다면, 어느 날 땔나무를 팔고 오는 길에 《금강경》읽는 소리를 한 번 듣고 마음이 밝아져 문득 깨쳤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홍인화상을 찾아가 인사드리니 홍인화상이 혜능에게 물었다.
너는 어느 곳 사람인데 이 산에까지 와서 나를 예배하며, 이제 나에게서 새삼스럽게 구하는 것이 무엇이냐?
제자는 영남사람으로 신주의 백성입니다. 지금 짐짓 멀리서 와서 큰스님을 예배하는 것은 다른 것을 구함이 아니옵고 오직 부처 되는 법을 구할 뿐입니다.
 
너는 영남사람이요, 또한 오랑캐거니 어떻게 부처가 될 수 있단 말이냐?
사람에게는 남북이 있으나 부처의 성품은 남북이 없습니다. 오랑캐의 몸은 스님과 같지 않사오나 부처의 성품에 무슨 차별이 있겠습니까?
이상의 내용이 홍인화상과 혜능스님이 처음 만나 주고받은 대화의 전부이다. 이를 통해 보건대, 혜능스님은 이미 출가 이전에 불성(佛性)에 대한 어떠한 확신에 가득 차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비록 지역이 다르고 몸뚱이가 다르다 하더라고 불성에는 아무런 차별이 없다고 하는 확신이야말로, 일자무식이었던 혜능이 당시 홍인 문하에서 가장 각광받던 신수를 제치고 의발을 받게 된 까닭이 아니었을까?
 
전법의 결정적 계기가 된 게송에서도 혜능스님은 ‘불성은 항상 청정하거늘, 어느 곳에 티끌과 먼지 있으리오’ 라고 주장함으로써, 몸은 나무요/ 마음은 밝은 거울과 같나니/ 때때로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먼지 묻지 않게 하라는 신수의 게송과는 그 근본적 입장에서부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사실상 신수스님의 게송이야말로 우리들이 보편적으로 생각할 수 있고, 또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내용임에 틀림없다. ‘우리의 본성은 밝은 거울처럼 맑고 깨끗하다. 그러나 업장의 때가 끼어 있어서 본성을 보지 못할 따름이다. 그러므로 부지런히 수행을 해서 업장의 티끌을 벗겨내면 바야흐로 본성이 드러날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꾸준한 수행을 통해서 마침내 깨달음을 얻는다고 하는 지극히 당연한 이치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혜능스님은 한 차원 훨씬 올라서 있다. 불성은 항상 청정한 것이다. 거기에는 이미 수행을 통해서 벗겨내야 할 티끌이나 먼지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우선적으로 중요한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의 성품을 보는 것(見性)이다. 그것은 이제부터 닦아서 부처가 되려는 것이 아니고, 누구나가 있는 그대로 본래 부처임을 확인하는 것이다. 그것은 시간과는 상관이 없는 일이다. 출신이나 신분은 물론, 학식이나 덕망과도 관계가 없다. 오직 자신의 성품을 스스로 돌이켜 비추어 보는 것이 중요하다.
 
대나무 그림자 섬돌을 쓸어도 티끌하나 일지 않고
달빛이 연못을 뚫어도 물에는 흔적하나 없도다.
(竹影掃階塵不動이요 月穿潭底水無痕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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