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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선 수행법- 간화선과 화두 드는법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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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2-03-13 03:07 조회1,59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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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선교육의 내용
 
(3) 간화선과 화두 드는 법 ②
 
9) 간화선은 대오선(待悟禪)이 아니다
 
지극한 이치를 궁구함에는 깨침으로써 법칙을 삼음이라. 그러나 첫째로 마음을 두어 깨치기를 기다리지 마십시오. 만일 마음을 두어 깨닫고자 기다리면, 기다리는 바의 마음이 도의 안목(道眼)을 장애하여 급할수록 더욱 더디어집니다. 단지 화두를 잡아가다가 문득 잡아가는 곳을 향해서 생사심(生死心)이 끊어지면, 이것이 곧 집에 돌아가 편안히 앉은 곳이다.
 
―《서장(書狀)》―
 
간화선에서는 본래 부처라는 것을 철저히 확인하기 위해서 깨침을 법칙으로 삼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결코 깨침을 기다려서도 안 된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시절인연이 무르익어 반드시 떨어지게 되어 있는 저 과실열매처럼 충분히 익을 때를 기다려야지, 생짜로 나뭇가지를 흔들어 떨어뜨리거나 미리부터 나무 밑에서 입을 벌리고 익기를 기다리기만 해서는 안 된다. 즉 간절하기는 하되, 속효심(速效心)을 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깨침을 기다리는 마음은 조급한 심정으로 알음알이를 내게 하며, 이러한 사량 계교야말로 공부를 제대로 되지 못하게 하고 의정을 일으킬 수도 없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화두를 참구함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주의해야 할 점은 깨침을 기다리지 않는 것이다. 깨닫겠다는 일념은 중요하다. 그러나 깨침을 기다려서는 안 된다. 단지 화두에 몰두해서 생사심이 파하면 되는 것이다. 오히려 깨침을 얻고자 기다리다 보면 그로 인하여 장애가 되어 깨침은 더더욱 더디어질 따름입니다. 간화선은 결코 대오선(待悟禪)이 아니다. 오히려 그 깨침을 기다리는 마음까지도 화두라는 용광로 속에 집어넣어 녹여버려야 한다.
 
경산대혜 선사도 ‘평소에 지견이 너무 많아 증오(證悟)를 구하는 마음이 앞에서 장애를 짓기 때문에 자기의 정지견(正知見)이 현전치 못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장애라는 것 또한 밖에서 온 것이 아니요, 또 별다른 일도 아니다’라고 하였으니, 어찌 분간할 것이 있겠는가? 이른바 십종병(十種病)이란 증오(證悟)를 구하는 마음이 근본이 되는 것이다.
 
―《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
 
여기서 말하는 십종병이란 ‘조주무자’ 화두를 참구함에 있어서 가장 주의하여야 할 병통 열 가지를 말한다. 조주무자 화두는 모든 화두의 대표격이므로, 결국 이것은 일반적으로 화두참구에 있어서의 열 가지 병통을 말해 준다 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 내용은 전적에 따라 약간의 출입이 있지만 대개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가 있다.
 
① 유(有)와 무(無)의 알음알이를 짓지 말며(不得作有無會)
② 진무(眞無)의 무(無)로 생각지도 말고(不得作眞無之無卜度)
③ 도리(道理)로써 이해하려고 하지 말며(不得作道理會)
④ 의근하(意根下)를 향해서 사량하고 계교하지도 말며(不得向意根下思量卜度)
⑤ 눈썹을 치켜올리고 눈을 깜박이는 데서 캐내려고 하지도 말며(不得向揚眉瞬目處卜根)
⑥ 어로상(語路上)에서 활계(活計)를 짓지도 말며(不得向語路上作活計)
⑦ 일 없는 갑옷 속에 드날려 있지도 말며(不得揚在無事甲)
⑧ 화두를 들어 일으킨 곳을 향하여 알려 하지 말며(不得向擧起處承當)
⑨ 문자로써 이끌어 증명하지 말며(不得文字中引證)
⑩ 어리석음을 가져다 깨닫기를 기다리지 마라(不得將迷待悟)
 
 
―《간화결의론》―·
 
이러한 열 가지 병이란 것도 알고 보면 증오(證悟)를 구하는 마음으로써 근본을 삼고 있다는 것이다. 대오지심(待悟之心)을 갖는다는 사실 자체가 자기 스스로를 못 깨친 중생으로 묶어 놓는 것이며, 나아가 깨침을 얻기 위해서 갖가지 계교나 사량분별 및 허망한 노력을 하게 만드는 근원처인 것이다. 그러므로 단지 한 개 무자만을 간(看)할지언정 깨닫고 깨닫지 못한 것과 뚫고 뚫지 못한 것을 관계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즉 간화선을 닦는 입장에서 우선적으로 기피하여야 할 점은 깨달음을 기다리는 마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10) 바로 지금 여기에서 오직 모를 뿐
 
그러므로 황면노자가 말씀하시되, 마음으로 망령되이 과거법을 취하지 말고, 또한 미래사에 탐착하지 말며, 현재에도 머무르는 바가 없어서, 삼세가 다 공적함을 요달하라 하시니라. 과거사에 혹 선(善)과 혹 악(惡)을 사량치 말지니, 사량한 즉 도를 장애하리라. 미래사를 계교치 말지니, 계교한즉 광란하리라. 현재사가 면전에 이르거든 혹 역(逆)과 혹 순(順)을 또한 뜻붙이지 말지니, 뜻을 붙인 즉 마음을 요동케 하리라.
 
―《서장(書狀)》―
 
깨침을 법칙으로 삼되, 깨치기를 기다려서는 안 된다. 자칫 상충되기 쉬운 이러한 두 가지 원칙을 다 함께 살려나갈 수 있어야 올바른 화두 참구가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화두 참구시에 오로지 깨침을 중시하다보면, 다만 미래의 향상사에만 마음을 두어 스스로를 못 깨친 중생으로 매어놓고 중생지견 가운데서 알음알이를 지어 깨닫기를 기다리기 쉽다. 그렇기 때문에 묵조선 측으로부터 간화선은 대오선이라는 비난도 받게 된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본래 부처라는 입장에 치중하다보면 깨침을 법칙으로 삼지 않고 도리어 방편시하는 현상이 벌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두 가지 입장을 함께 살려나갈 수 있는 중도적 방법은 무엇일까?
본래 불교에서는 제행무상의 도리를 중시하고 있다. 즉 과거는 지나갔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으며, 현재라고 할 때 그 현재는 머무름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깨침을 기다리지 않고 화두를 드는 입장에서는 앞의 시간과 뒤의 시간이 끊어진 상태인 전후제단(前後際斷)이 되어야 한다. 일도양단(一刀兩斷)하여 더 이상 뒤를 생각하거나 앞을 사량치 아니하여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현전일념(現前一念)을 중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만 일념을 단속해서 화두를 들것이요, 깨치고 못 깨치고에 상관없이 오직 ‘이 뭣고’하는 의심덩어리만이 홀로 뚜렷해지는 의단독로(疑團獨露)를 달성하고자 노력할 뿐인 것이다. 이것은 오랜 세월을 요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의단을 갖는다는 것은 견성체험을 살리는 입장임을 알 수 있다. ‘모르겠습니다’하는 마음가짐에서 비로소 알 수 없는 의심이 일어난다. 정작 근본적인 질문에 대해서는 대답하지 못하는 바로 이 ‘모르는 마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럼으로써 ‘내 견해’ ‘내 여건’ ‘내 상황’이 사라지게 할 수 있다. 이것은 기존의 잘못 알고 있는 악지 악각(惡知 惡覺)을 쓸어 없애주는 것이다. 즉 ‘나, 나의, 나를’을 사라지게 하며, 비로소 올바른 정지견(正知見)이 드러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경각을 얻기 전에는 완전히 바보처럼 멍청이처럼 여올여치(如兀如痴)하게 지내면서 분별지해로써 알려고 하지 말고, 다만 모른 채로 오직 모를 뿐인 화두를 챙겨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비로소 깨치고 못 깨치고에 상관없이 화두가 한 조각을 이루어(打成一片) 의단이 독로해지고 시시각각으로 법희선열(法喜禪悅)을 느껴나가 안락의 법문을 이루게 될 것이다.
 
요컨대 깨침으로써 법칙을 삼는 간화선의 입장에서는 비록 견성체험을 중시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견성에 너무 얽매여서도 안 된다는 중도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본래 부처임을 확신하는 조사선의 초기적 입장을 기반으로 두고 있으면서도 현실적으로 번뇌망상을 다스려나가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을 표명하고 있다. 본래 부처임을 확실히 믿는다면, 본래 부처인데 왜 이리 차별적 번뇌망상이 끊이지 않는가 하는 의심이 일어날 것이다.
 
그러므로 먼 미래가 아닌 ‘바로 지금 여기에서’ 이러한 근원적 의심을 비롯한 천 가지 만 가지 의심을 오직 하나의 의심으로 응축시켜 ‘오직 모를 뿐’인 마음가짐으로 화두로 곧장 나아가, 이 한 가지 의심덩어리를 타파시킴으로써 천만 가지 의심을 일거에 타파하고 더 이상 의심할 여지가 없는 참다운 본래 부처의 자리에 들어서게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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