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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선 수행법-화두의 분류(선문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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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2-03-13 03:28 조회1,40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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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두의 분류
 
2. 선문답(禪問答)
 
선문답의 개요
 
 
선문답은 깨달음의 응용과 확인 그리고 체득을 지향하는 선종의 전통적인 표현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뜬금없는 동문서답이나 내용 없는 언어의 유희는 아닌 것이다. 오히려 잘 가꾸고 보존되어 내려온 선종의 전통적이고 비밀스런 문화에 속한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인류가 가진 가장 위대한 표현기능은 아직까지도 여전히 <묻고 답하는 일이다> 이것은 모든 문화발전의 원동력이자, 인간이 지닌 가장 본능적인 <자기표현수단>이다.
 
우리는 불교의 가장 본질적인 부분을 <묻고 답하는 일> 이야말로 정말로 어렵고 힘든 일임을 충분히 알 수 있다. 더우기 실제적인 수행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는 선종의 가르침은 더더욱 질문에 대한 답을 어렵게 만든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들은 자연스럽게 하나의 범주 속에서 발견되어진다. 이것이 바로 선문답이다. 선문답은 동문서답이 아니요, 신비적인 유희도 아니다. 선가의 언어 체계 속에서 드러나는 절실한 표현방식인 것이다.
 
선문답
 
선문답은 선(禪)을 지도, 체득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선사(스승)와 납자(제자) 사이의 문답이다. 어찌 보면, 좀 특수한 상황 속에서 일어나는 특수한 대화라고도 말할 수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선문답에는 항상 명확한 주제가 있다. 그것은 불교의 진리를 체득하는 것에 관한 것과 불교의 진리, 즉 선종에서의 선(진리) 그 자체인 것이다. 이러한 선의 진리를 서로 묻고 답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설명이나 가르침이 없다. 단지 물음에 대하여 단순하게 드러낸 대답이 있을 뿐이다. 또한 선문답은 깨달음에 관한 검증을 위해서도 쓰여진다. 엄격한 의미에서 말한다면 선문답은 깨달은 사람 사이의 법의 문답이라고 보아야 한다.
 
 
물론 교종적 설명이 아니고, 선종의 전통적인 방식으로 묻고 답하는 것이다. 여기에 선문답의 난해한 면이 있는 것이다. 선문답에는 그래서 선기(禪機)가 드러난다. 여기에서 막힌다면 그것은 곧바로 물은 사람의 현성공안(現成公案)이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구체적인 가르침의 방편이 또한 선문답인 것이다.
 
억지로 이야기하자면, 선문답은 깨달은 사람이 선종의 전통적 방식에 의해서 본체를 드러내 보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또한 공안과 함께 선사의 지극한 지도편달의 한 방편이다. 선종의 이러한 전통적 방식은 대화를 통해서도 나타나고, 시적(詩的) 형식을 빌린 게송을 통해서도 드러내어진다.
 
초심자가 공안(公案, 화두)을 보면
 
초심자의 경우에는 완전히 헛소리처럼 들리기 쉽상이고 아니면 전혀 반대인 신비주의적으로 빠져든다. 그러나 선문답은 결코 있지도 않은 허위를 꾸며낸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선의 진리를 그대로 일상적 언어를 통해 뱉어 낸 행위에 불과한 것이다.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禪의 도리를 설명해 들어가는 것은 오히려 올바른 수행을 해나가는 데 장애만을 줄뿐이다. 하지만 선문답을 완전히 비논리적 유희나 동문서답식 해프닝으로만 받아들이는 현상이 존재한다면 이것 역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선은 바로 불교의 정수이고, 이러한 선을 접할 기회를 상실하는 것은 올바른 불교를 배우는 기회를 잃어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선문답에 사용되는 언어
 
다양한 언어들이 선문답을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시적인 표현을 위주로 표현하는 悟道頌이나 傳法偈 등의 게송을 살펴보면 상당한 상징과 비약이 등장한다. 그러나 거기에 사용되는 언어도 마찬가지로 상식적 언어의 수준을 넘지 못한다.
 
다만 논리의 비약이 따를 뿐이다. 혹시 이해 못 는 단어나 어휘는 시대상황 속에서 지금은 약간 이해하기 어려운 방언이나 도구의 이름 정도가 고작이다. 그리고 선문답에서는 단순한 언어만 등장하는 것이 아니고, 할, 방, 손짓, 발짓, 몸짓, 시늉 등의 광의의 언어가 등장하기도 한다.
 
 
할은 벽력 같은 큰 소리를 지르는 것이고, 방은 주장자로 상대를 치는 것이다. 또한 손짓, 발짓, 몸짓, 시늉 등이 모두 상황상황에 맞게 적절하게 구사되어진다. 난데없이 계속 소리만 지른다면 그것 또한 선사를 흉내내는 사선(死禪)일 것이다.
 
선문답의 기능과 한계
 
선문답이 공안화되어 수행의 지침으로 쓰이는 것은 간화선의 훌륭한 전통이다. 물론 간화선의 병폐를 동시에 경계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선문답은 그 자체로는 아무런 효과가 없다. 즉 수행이 없는 선문답은 성립도 안 될 뿐더러, 있을 수도 없다는 말이다. 또한 선문답만을 일삼는다면, 이것 또한 하나의 폐단으로 흐를 가능성이 생긴다.
 
 
수행에 힘쓰지 않고 언구言句에 쫓아다니며 허덕이는 이가 분명히 생길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간화선에서 가장 경계하는 것이다. 따라서 함부로 입을 놀리는 것을 조심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깨달음은 결코 선문답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선문답으로 인해 생긴 공안에 의지해서 올바른 수행이 지어졌을 때만이 깨달음의 조건이 갖추어지는 것이다. 선문답은 깨달음의 응용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깨달음의 드러냄인 것이며, 또한 확인인 것이다. 공안 하나를 뚫으면 1800 공안을 다 뚫는다는 것이 빈말이 아닌 것이다.
 
 
물론 훌륭한 선사의 적절한 한마디는 기연으로 맞아 떨어질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항상 참구하며, 수행하는 자세일 것이다. 선문답은 활발발지한 응용의 세계이므로, 깨달은 사람의 입장에서 본다면 무척이나 중요시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미혹한 입장에서 보면 더욱더 미혹을 가중시킬 가능성 또한 적지 않다. 아무리 활발발지(活潑潑地)한 선문답의 세계도 결국은 공안 하나의 진리에 근거하고 있다. 오로지 힘써 수행하는 자세가 먼저 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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