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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선 수행법-생활선 이해(목조선)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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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2-03-13 03:18 조회1,29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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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선교육의 내용
 
5) 생활선 이해(묵조선)
 
21) 일체는 중생이고 실유(悉有)이며 불성(佛性)이다
 
세존께서 말씀하신 일체 중생은 모두 불성을 갖추고 있다(一切衆生 悉有佛性)는 말의 참뜻은 어떠한 것인가? 그것은 이름지을 수 없는 그 무엇이 분명하게 현전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느 때는 중생이라 부르고, 어느 때는 유정(有情)이라고 하며, 어느 때는 온갖 생물 어느 때는 온갖 생류(生類)라고 하는 것이 모두 중생이며 일체 존재이다.
 
다시 말해서 온갖 존재(悉有)가 불성이며, 그 온갖 존재의 한 온갖(一悉)을 중생이라 한다.
 
―《정법안장 正法眼藏》―
 
《열반경》의 핵심사상은 일체 중생은 모두 불성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법안장》의 저자이며 일본 조동종의 개조인 도원(道元, 1200-1253 도오겐)선사는 이를 일체는 곧 중생이며, 온갖 존재로서, 불성이다라고 끊어 해석하고 있다.
 
첫째로, 일체는 중생이라는 것은 일체는 살아있다는 의미이다. 통례로 살아 있다고 하면, 동물만을 살아 있다고 생각하고 초목이나 산하 등은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동물만이 아니라 풀도 나무도 산도 강도 모두가 살아있는 것이다. 즉 중생이란 생생하게 살아 있는 것이며, 그 위에 그것이 불성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부처의 생명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산하대지가 모두 불성의 바다인 것이다.
 
그러므로 통상 불살생계(不殺生戒)라고 하면, 살아 있는 생명을 죽여서는 안 된다는 의미로 해석하지만, 참된 의미는 부처의 씨앗을 증장 한다는 뜻이다. 부처의 씨앗을 증장시킨다고 하면, 사람들 가운데에 내재하고 있는 불성을 끌어내서, 그것을 더욱 크게 생장시키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불성이란 드러나 있는 일체의 것이 살아 있는 것이며, 부처의 생명을 살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부처의 씨앗을 증장시킨다는 것은 온갖 사물, 풀과 나무와 산과 강의 생명을 살리는 것이다.
 
풀과 나무와 산과 강의 생명과 하나가 되어, 인간 자신이 이들 생명과 함께 사는 것이다. 눈을 맑게 하면 풀도 나무도 진리의 자태를 열어 보이며, 귀를 맑게 하면 산도 강도 진리의 소리를 노래하고 있는 이 같은 경지에 이른 때에 비로소 한 포기 풀, 하나의 사물의 진실이 분명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의 사물을 깨닫는 것이며, 한 포기 풀을 깨닫는 것이다.
 
둘째로, 일체는 온갖 존재(悉有)라 함은, 전 세계에 감추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전 세계에 있어서의 일체가 지금 여기에 현전하고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일체는 드러나 있으며, 어느 것 하나 감추어진 것은 없다. 그러므로 불성을 미래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우리 둘레 도처에 나타난 데서 찾아야 하는 것이다.
 
상식적으로는 시간과 존재를 별개의 것으로 보고 있지만, 사실 존재는 곧 시간인 것이다. 시간과 자신은 하나이기도 하다. 어느 한 순간이 단지 이동해 가는 한 순간의 모습이 아니고, 시간을 초월한 ‘영원의 지금’이라는 뜻이다. 예컨대 산에 오르는 때는 현성(現成)하고 있는 것은 산뿐이며 전 세계는 지금의 산에 다하고 있어서, 전 시간은 등산하는 지금에 다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강을 건너는 때에는 현성하고 있는 것은 강뿐이어서 전 세계는 지금의 강에 다하고 있으며, 전 시간은 도하하고 있는 지금에 다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입장은 생사(生死)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삶도 일시의 모습이며 죽음도 일시의 모습이다. 이를테면 겨울과 봄과 같은 것이다. 사람들은 겨울 그 자체가 변한다고는 생각치 않으며 봄 그 자체가 여름으로 된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삶으로부터 죽음으로 움직여 변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삶이라고 하면 완전히 삶이 되어져 있어 처음부터 끝까지 삶이다. 죽음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삶이 오면 다만 삶에 마주하고 죽음이 오면 죽음에 향할 따름이며, 삶과 죽음을 내 것으로 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원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생사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극한 상황이지만, 모든 것은 시시각각 흘러가고 있는 것이며, 이러한 의미에서 모든 것은 시시각각 태어나고 죽어 가는 것이다. 인간도 이러한 만물의 일원으로서 시시각각 태어나고 죽어 가는 것이다. 하루 밤낮을 나누어 보면 64억9만9980의 찰나가 있어서 오온이(五蘊) 모두 생멸하는 것이다. 이렇다 해도 범부는 일찍이 알아차리지 못하며, 알아차리지 못하기 때문에 보리심을 일으키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법을 알지 못하고, 불법을 믿지 못하는 자는 찰나 생멸의 도리를 믿지 않게 되는 것이다.
 
셋째로, 온갖 존재는 불성이라고 하는 것은, 현상세계의 무상교류의 모습이 그대로 불성이라는 것이다.
 
초목의 무상(無常)함이 곧 불성이다. 사람의 몸과 마음의 무상함이 또한 불성이다. 국토산하가 무상함은 곧 불성인 까닭이다. 최상의 깨달음인 아뇩다라삼먁삼보리 또한 불성인 까닭에 무상이다. 대반열반 또한 무상인 까닭에 불성이다.
 
―《정법안장》―
 
이처럼 현상세계의 무상한 모습이 그대로 절대적 의의가 있는 것이어서, 사람들이 찾고 있는 진리라는 것은 사실은 모두가 경험하고 있는 현실세계 그 자체와 다름없는 것이다. 온갖 것 하나하나 일상생활 전부가 지혜의 드러남, 진리 자체의 체험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허공 꽃(空華)이나 그림의 떡(畵餠)에서 잘 드러난다. 즉 일체는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허공 꽃이며, 사라졌다가 나타나는 그림의 떡이어서, 실체가 있는 것은 하나도 없지만, 일시적 모습 외에 따로 영원이라는 없는 것처럼, 거짓된 모습 외에 따로 진실은 없다.
 
진실은 이미 현재에 이 허공 꽃 가운데에 남김없이 드러나 있는 것이다. 병든 눈에 비치고 있는 허공 꽃은 일시적 모습이며 거짓된 모습이지만, 일시적 모습이며 거짓된 모습인 이 허공 꽃 외에 진실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다고 하는 것이다. 진실은 현재 이 허망한 현실에 아낌없이 드러나 있는 것이다. 이 허망한 현실을 벗어나서 어디에 진실의 도가 있겠는가?
 
아울러 일체의 세계 및 일체의 사물은 모두 그림의 떡이기 때문에, 인간이 체험하고 있는 진리는 그림으로 나타나고, 부처는 그림에서 생겨난다. 따라서 그림에 그려진 떡이 아니면 허기를 채워주는 약이 없다고 해석하고 있다.
 
결국 일체의 중생이 그대로 불성이며, 일체의 불성이 그대로 일체의 중생인 것이다.
 
22) 생명을 생기 있게
 
마곡산의 보철선사가 어느 때 부채를 부치고 있었다. 거기에 어떤 스님이 와서 물었다. 바람의 본질은 변하지 않고, 두루 작용하지 않는 곳이 없거늘 어째서 당신은 부채를 부치고 있습니까?
그러자 선사가 대답했다.
자네는 바람의 본질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것이 두루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고 하는 말의 올바른 의미를 알지 못하고 있군.
그렇다면 그것은 어떤 것입니까?
선사는 묵묵히 부채를 부치고 있을 따름이었다.
스님은 깊이 감격하여 예배했다.
 
―《정법안장 正法眼藏》―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모든 사물의 진실은 지금 여기에 남김없이 드러나 있다. 그렇다면, 지금 자신이 있는 곳에 정신차리면 저절로 수행이 가능하고, 진리가 실현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넓게 행동할 필요가 있으면 널리 행하고, 좁게 나아갈 필요가 있으면 좁게 나아가는 새나 물고기처럼, 지금 자신이 나아갈 길에 정신차리면 저절로 수행이 가능하며 진리가 실현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깨달음이 반드시 지식이 되어 논리적으로 이해되어서는 한이 없다. 즉 깨달음이란 표면적 이해를 초월해 있는 것이기 때문에 깨달음의 궁극이란 수행에 의하여 즉각 체험되는 것이지만 이것이 자신에 의하여 마음을 써서는 한이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바람의 본질은 변하지 않기 때문에 부채를 부치지 않아도 된다. 부채를 부치지 않더라도 바람을 느끼는 것이 가능하다고 한다면, 바람의 본질을 알지 못하고 또한 그 본질이 변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바로 일체의 사물 그대로가 진리 그 자체요, 일체중생 그대로가 불성 그 자체임에도 불구하고, 발심하고 수행하여 깨달음을 얻는 궁극적 이유인 것이다. 여기에 진리를 실현하는 경지가 있으며, 진리를 실현하는 길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도의 궁극은 ‘생명을 생기 있게’ 만드는 것이다. 한 가지 일 한 가지 행동에 투철함으로써 지금 여기서 우리의 생명을 실현시키는 생동이야말로 불도의 궁극인 것입니다. 참으로 생동한다는 것은 어떠한 것일까?
 
생동한다고 하는 것은 사람이 배에 오르는 것과 같은 것이다. 내가 돛을 써서 내가 키를 잡고 삿대질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배가 나를 태우며 배외에 나는 없다. 내가 배에 오르는 것에 의하여 그 배를 배라고 하고 있다. …이처럼 생명은 내가 생기게 하는 것이다. 나를, 생명이 되어져 있는 나라고 하는 것이다.
 
내가 배에 오르면 나의 심신 및 그 주변의 모든 것이 배의 세계가 되고 대지의 전체, 허공의 전부가 배의 세계가 되는 것이다. 내가 생(生)과 일체이고 생이 나와 일체라고 하는 것은 이와 같은 것이다.
 
―《정법안장》―
 
그렇다면, 지금 여기의 이 한 가지 일 한 가지 행동에 전신으로써 완전히 뛰어드는 것이야말로 진리의 체험이다. 한 가지 일 한 가지 행동을 통해서 자아가 완전히 소멸되어 절대의 진리와 하나가 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입장이나 능력 범위 내에서 이것저것 사색하여 진리를 알고자 해서는 안 된다. 즉 모든 사물의 진실을 알기 위해서는 바다와 산이 둥글다든가 사각이라든가 보는 이외에 그 밖의 자태가 끝없이 무한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자신의 주위환경뿐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 속에도 무한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만법이 스스로 나아가서 자기를 닦고 깨치는 입장과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자기를 나아가서 만법을 닦고 깨치는 자기의 전환을 개입시키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이러한 자기의 전환을 가능케 하는 자아소멸의 도로써 좌선을 권장하는 것이다.
 
2. 보완교육
 
(1) 특 강
 
특강은 90분씩 3회로 구성되어 있다. 특강은 초청강사가 진행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며, 그 주제는 다음과 같다.
 
(1) 선(禪)과 음악
(2) 한국의 근세 선사들
(3) 선(禪)과 차(茶)
 
(2) 질의 응답
 
이 시간에는 우선 ‘본 마음․참 나’의 개요를 설명한다.
그 후 차담(茶談)을 하며 자유롭게 질문을 받고, 이에 대하여 응답을 하는 방식으로 진행한다.
 
(3) 독 송
 
독송은 참선곡과 금강경으로 한다. 경허스님의 ‘참선곡’은 참선의 근본원리를 밝혀주며 구구절절이 분발심을 일으켜준다. 금강경은 현 조계종의 소의경전으로서 마음을 닦고 밝히는 방법을 명확히 나타내 주고 있다. 시간 관계상 한번씩이라도 독송하는 요령을 익히게 하여, 추후 집에 돌아가서 스스로 독송함으로써, 올바른 참선의 지침을 삼을 수 있도록 하는 데 그 의의가 있다.
 
(4) 108참회
 
아침 예불 후에는 108배를 한다. 이것은 참선에 앞서 몸과 마음을 준비케 하는 의미가 있다. 108참회를 통해 마음의 업장을 덜어냄과 동시에, 몸의 긴장과 함께 다리를 푸는 효과가 있다. 죽비는 가능한 천천히 치도록 한다.
 
(5) 행선(탑돌이)
 
마지막으로 교육되는 행선은, 좌선에 국한되기 쉬운 참선의 의미를 생활선으로 살리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아울러 고요한 심야의 산사에서 달과 별을 바라보며 탑이나 법당 등을 무리지어 천천히 도는 것은 평생 잊기 힘든 체험이 될 것이다.
아울러 발우공양, 운력 내지는 취침시간조차도 모두 참선의 일환으로써 진행될 수 있다는 취지를 십분 이해시켜 가정에 돌아가서도 배운 바를 활용할 수 있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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