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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종 교육원 주관, 대상무역로를 넘어 불교 동전 (東傳)의 길, 실크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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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작성일16-11-14 23:49 조회70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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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무역로를 넘어 불교 동전 (東傳)의 길, 실크로드

철산스님과 함께하는 실크로드 불교유적순례<上>

  • 중국 신장위구르자치구 = 어현경 기자
  • 승인 2016.10.04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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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경하는 스님들.

불교가 전래된 이래 많은 스님들이 불교의 원류를 찾아 서역으로 떠났다. 목숨을 걸고 구법순례에 나섰던 스님들 가운데 중국의 현장스님을 비롯해 신라의 혜초스님 외에도 이름 모를 숱한 스님들이 낯선 서역 땅에서 생을 마감했다. 조계종 교육원(원장 현응스님)은 지난 9월20일부터 28일까지 7박9일간 ‘철산스님과 함께하는 실크로드 불교유적순례’를 진행했다. 30여 명의 스님들은 중국 우루무치를 출발해 서역북로인 쿠얼러, 쿠차 지역 외에도 타클라마칸 사막을 횡단해 호탄과 서역남로와 북로가 만나는 카스를 순례하며 그 옛날 선배 스님들의 신심과 열정을 떠올렸다.

구마라집스님의 고향 쿠차

사막지대로 석굴사원 발달

키질석굴 참배하며 예경해

 

인도 및 페르시아 영향 속

조성된 벽화 눈길 사로잡아

우루무치에 도착한 스님들이 처음으로 찾은 곳은 쿠얼러(庫爾勒)로, 이곳에는 실크로드 천산남로의 중요한 요충지였던 철문관(鐵門關)이 있다. 철문관은 신장지역을 남북으로 잇는 길이다. 629년 천축으로 떠나 16년 만에 장안으로 돌아와 <대당서역기>를 쓴 현장스님이나 <왕오천축국전>을 쓴 혜초스님도 이곳을 거쳐 안국(安國)으로 갔다는 기록이 있다. 이곳에는 현장스님과 서역정벌의 공을 세웠던 장건, 반초 등의 조각상이 세워져 있다. 멀리 보이는 험준한 계곡을 보니 이 길을 걸었던 이들의 고행이 눈앞에 그려진다.

이튿날, 해발 1800m 고개를 넘고 7시간 이상 메마른 땅을 달려 도착한 곳은 쿠차(庫車)이다. 이곳은 수많은 경전을 한역해 우리에게도 익숙한 구마라집스님의 고향이기도 하다. <대당서역기>에 따르면 “동서 1000여 리, 남북이 600여 리, 땅은 수수 보리를 심기에 알맞고 포도 석류가 나며, 배, 사과, 복숭아, 살구가 많다. 절은 100여 군데, 스님은 5000여 명으로 설일체유부를 학습하고 있다. 대성 서문 바깥 길 좌우에는 높이 90여 척되는 입불이 있는데 이 상 앞에서 5년마다 승속과 귀천을 가리지 않고 대중을 공양하는 재회가 열린다. 왕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이 시기 세속의 일을 그만두고 계를 지키며 경을 받고 설법을 듣는다. 또 많은 가람의 불상을 진귀한 보석과 비단으로 장식하고 가마에 싣고 다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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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대다수 위구르인들이 이슬람교를 믿지만, 현장스님이 찾아갔을 때만 해도 불교가 성행했음을 알 수 있다. 척박한 사막지형인 이곳에는 석굴사원이 유독 많다. 키질석굴 외에 키질가하, 쿰트라석굴 등이 전해진다. 순례단이 찾아간 곳은 무자라트 강 북쪽 바위산에 조성된 키질석굴이다. 2km에 걸쳐 조성된 석굴은 236개가 현존하지만, 보존상태가 양호한 곳은 70개 미만이고, 관람객들이 하루에 볼 수 있는 석굴은 5~6개에 불과하다.

우루무치에 도착해 장장 이틀을 달려 쿠차에 도착한 스님들은 설렘을 안고 석굴로 향했다. 순례단을 가장 먼저 맞이한 것은 바위 위에 앉아 사유하는 듯한 모습을 취한 구마라집스님의 조각상이다. 천축국 사람인 스님의 오똑한 코와 날카로운 눈매는 인도인의 형상과 비슷하다. 그 곁에서 순례단 스님들은 삼귀의와 반야심경을 독송했다. 가사 장삼을 수하고 목탁 소리와 함께 스님들의 목소리가 석굴 주변으로 퍼져나갔다. 그 옛날 실크로드가 번성했을 당시 서역과 중국을 오가는 대상들이 이곳에 사원을 조성하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스님들이 이곳에서 정진하는 모습을 상상해봤다.

척박한 바위산에 동굴을 개착하고, 그 안에 회칠을 한 뒤 그림을 그리는데 드는 비용이 오늘날 서울의 아파트 한 채 값과 맞먹는 가격이라고 하니, 그들의 신심을 어렴풋이나마 짐작해본다. 특히 벽화를 채색하는데 주로 사용된 안료인 라피스라줄리는 청아한 청색빛 암석으로, 금보다 몇 배나 비싼 안료였다. 아프가니스탄 인근에서 출토됐는데, 이 시기 활발했던 대상무역을 보여주는 예이기도 하다. 1000년이 넘은 지금도 선명한 청색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키질석굴 벽화는 중국 본토보다는 인도나 페르시아의 영향이 더 강하다. 돈황석굴의 벽화를 본 적 있다면 그 차이를 확연히 알 수 있다. 인도에서 탄생한 불교가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으로 전해지는 길목에 위치한 쿠차의 지형적 위치 때문이라 볼 수 있다. 석굴이 처음 만들어진 시기는 명확하지 않은데 3세기 말부터 5세기 말이라는 설까지 다양하다. 석굴이 집중적으로 조성된 것은 6~7세기라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독일의 발트슈미트는 키질석굴 벽화를 크게 3기로 구분했는데 1기는 따뜻한 색 계열의 채색이 두드러지며 2기는 라피스라줄리가 사용된 차가운 계열의 채색이 주를 이룬다. 3기는 당나라의 영향을 받은 시기다.

이날 순례단이 참배한 굴은 27굴, 32굴, 34굴, 8굴, 10굴, 17굴이다. 굴 내부에는 벽화보존을 위해 CCTV가 설치돼 있으며, 한꺼번에 많은 인원이 들어갈 없도록 관리되고 있다. 석굴의 내부구조를 보면 내부에 탑과 같이 기둥이 세워진 중심주굴과 스님들이 거주하는 승방굴, 방형굴로 구분된다. 참배한 굴 대부분은 중심주굴의 형태로 주실, 중심주, 회랑, 후실로 구분된다.

동굴에 들어서면 주실 좌우와 측면에 석가모니부처님의 전생담을 그린 본생도와 부처님 생애를 그린 불전도, 부처님께서 설법하는 인연을 표현한 그림들이 그려진다. 돈황석굴 벽화가 본생담이나 부처님 일대기를 파노라마 형태로 상세하게 묘사했다면 키질석굴의 벽화는 산악무늬로 구분된 마름모꼴 내에 결정적인 한 장면만을 표현한 것이 특징이다. 중심주 정면에는 감실을 만들고 흙으로 빚은 불상을 봉안했던 흔적만 남아 있다. 회랑을 지나 후실로 가면 부처님 열반의 모습이 벽화나 불상으로 조성돼 있다. 회랑을 돌아 다시 주실로 나오면 동굴 입구 상부에 미륵보살의 설법도가 그려져 있는 것이 키질석굴의 일반적인 구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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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질석굴 17굴 입구 상단의 미륵보살 설법도.

그러나 모든 벽화가 완벽하게 남아 있는 굴은 거의 없다. 오랜 세월이 흐른 탓도 있지만, 20세기 들어 서구열강이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좋게 말하면 탐험, 나쁘게 말하면 약탈을 벌였다. 특히 독일 베를린민족박물관 무급 연구자였던 르콕은 선원 출신의 바르투스와 함께 키질석굴의 벽화를 절취해 베를린으로 옮겨갔다. 독일이 석굴벽화를 절취한 뒤 각종 보고서를 통해 정리함으로써 키질 석굴 연구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사실이다. 

키질석굴은 한국과도 밀접한 인연이 있는데, 바로 조선인 화가 한낙연이 여기 머물며 굴번호를 매기고, 일일이 모사도를 그리며 자료를 남겼으나 귀국길에 비행기 추락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노력이 10굴 벽에 글자로 새겨져 있으며, 사진 액자가 남아 있다.

순례단 지도법사 철산스님은 “구법승들의 발자취를 따라 실크로드를 순례한 적이 있는데 여러 스님들과 함께 천산남로를 함께 돌아보니 감회가 새롭다”며 “융성했던 불교가 흔적만 남아 안타깝기도 하지만, 과거 스님들이 목숨을 걸고 법을 구하려 했던 그 의지와 신심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  구마라집스님은…  

<고승전>에 기록된 구마라집스님의 생애를 보면, 스님은 천축국 사람으로 대대로 나라의 재상을 지낸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구마염은 출가해 파미르고원을 넘어 구자국으로 왔는데 구자국왕이 그를 국사로 삼았다. 왕은 자신의 누이동생이 구마염을 좋아하자 그를 핍박해 아내로 삼게 했다. 얼마 후 아이를 가졌는데 바로 구마라집스님이다. 구마라집스님이 태중에 있을 때 그의 어머니는 이해력이 평소보다 늘었고 갑자기 천축어를 능통하게 할 수 있었는데 스님의 영향 때문이라고 전한다. 

구마라집이 일곱살이 되던 해 어머니와 함께 출가했다. 어릴 때부터 명석해 스님의 뛰어남은 중국 본토에까지 소문이 날 정도였다. 382년 전진의 부견왕이 서역정벌을 위해 여광 장군과 7만 군사를 파견해 구자국과 언기국 등을 무너뜨리고 구마라집스님을 사로잡았다. 스님을 데리고 본국으로 돌아가던 중 스님의 조언으로 여러 차례 위험에서 벗어난 여광은 스님의 가르침을 따르게 됐다. 귀로에서 부견이 사망했단 소식을 접한 여광은 후량을 세웠다. 스님은 여 씨 부자에 의해 양주에 머물렀으나, 401년 후진의 2대 왕인 요흥이 군사를 일으켜 여 씨를 항복시키고 스님을 장안으로 모셔갔다. 그곳에서 스님은 800여 스님에게 경을 강설하고 경전을 번역했다. <대품반야경>을 비롯해 <금강경> <십주경> <법화경> <유마힐경> <무량수경> <미륵성불경> 등을 번역했다. 특히 <대지도론>은 용수보살의 저술로 전해지나 사실상 스님의 손에서 다시 쓰였다는 게 학계의 정설이다. 300여 권의 경론을 번역한 스님은 409년 8월 장안에서 입적했다. 

[불교신문3237호/2016년10월5일자] 

 

 

 

 

 

중국 신장위구르자치구 = 어현경 기자  eonaldo@ibulgy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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